Inner Skiing Part. 3

2008. 12. 4. 10:53 from Favorite/Ski


제3장: 자연스러운 배움이 진정한 배움이다

 


아이들이 더 쉽게 배운다

 


친한 친구 딕이 얼마 전에 나를 찾아왔다. 몇 년 동안 스키를 타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아이들을 데리고 일 주일 동안 스키 여행을 가기로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섯 살 된 막내 아들 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물었다. “그렇게 어린 애들은 어떻게 가르치나?”

“가장 중요한 건 너무 많이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거라네. 우선 애를 따뜻하고 편안하게 해 주고, 무엇보다도 스키를 즐기게 해야 해. 그럼 그만이지. 이러쿵저러쿵 너무 많은 걸 가르치지 말게. 사실 그냥 혼자 알아서 타도록 내버려두는 게 가장 좋아.” 나는 그러면서 벤과 함께 스키를 타면서 할 수 있는 놀이도 몇 가지 가르쳐 주었다.

몇 주 뒤 딕이 다시 찾아왔을 때 스키 여행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네가 벤을 봤어야 하는데. 정말 타고났더라니까! 평생 동안 스키를 탄 사람처럼 첫 날부터 초보자용 슬로프를 거침없이 내려왔다네. 몇 마디 해 주지도 않았는데 회전도 아주 잘하고. 어쩌다 넘어지기는 했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고 벌떡 일어나서 다시 타는 거야.”

“그걸 보니까 괜히 심술이 나더라고. 그래서 어느 날 아침 강습을 받기로 했지. 강사는 스키를 정말 잘 타는 친구였고 잘 가르치는 것 같았어. 내가 문제였지. 정말 애먹었네. 강사가 한 말을 상기하면서 내 몸한테 그대로 하라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되더군. 아무리 애써도 옛날 자세가 안 나오는 거야. 벤은 힘도 안 들이고 잘도 타는데 말이지. 머리가 다 아프더군. 나는 이미 알고 있는 방법대로 하는데도 안 되고, 녀석은 난생 처음 타는데도 잘만 타고... 지도를 받지 않아서 아직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녀석은 정말 부러울 만큼 자연스럽게 탔어. 그것도 아주 재미있게 말이야.”

벤과 딕이 스키를 배울 때의 차이점은 정신 상태였다. 딕은 줄곧 스키 타는 법을 생각하면서 탔고, 벤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탔다. 딕의 정신은 올바른 회전법을 이해하고, 매순간 의식적으로 몸을 조종하고, 그 결과를 분석하느라고 바빴다. 그리고 딕은 실수를 할 때마다 스스로를 맹렬히 비판하면서 더욱더 긴장했다. 그러나 벤은 다른 사람들이 타는 것을 보고 그저 따라 했다. 회전법을 분석하려 하지도 않았고, 올바로 회전하거나 잘 타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벤은 그저 스키를 즐기려 했으므로 긴장하지 않고 탈 수 있었지만, 딕은 스키를 즐기는 한편 많은 것을 배우려고 너무 애를 쓴 것이다.

여러분도 앙증스러운 꼬마들이 그 작은 스키를 신고 다 큰 초보자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것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처음 스키를 신을 때부터 스키에 대한 선천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몸이 잔뜩 굳은 채 간신히 슬로프를 한 번 내려올 때 아이들은 벌써 다섯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한다.

아이들은 뭐든지 잘 배운다. 심리학자들과 학습이론가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생후 5년 동안 배우는 것이 그 나머지 기간 동안 배우는 것보다 많다고 한다. 왜 그럴까? 아이들은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알까? 우리는 한때 알았던 뭔가를 잊어 버렸을까?

아이들은 빨리 배운다. 무슨 일을 하는 방법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벤은 스키를 제대로 타는 법에 대해 아무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슬로프에 올라가서 다른 사람들이 타는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몸에 맡기고 본 대로 따라 했을 뿐이다. 벤의 정신은 맑고 열려 있었기 때문에 뭔가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딕의 정신은 ‘이래야 된다, 저러면 안 된다’ 따위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뭔가를 배울 수 없었다. 몸보다는 머리로 스키를 탄 것이다.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가르침 때문에 스키와 몸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개념에 의한 학습-올바르게 하려고 애쓰기

 


사춘기 때 댄스 교실에서 박스 스텝을 배우던 것이 생각난다. 우리는 “앞으로, 옆으로, 모으고, 뒤로, 옆으로, 모으고...” 하고 외치며 스텝을 연습했다. 그러다가 웬만큼 익숙해졌을 때 음악이 연주되었고, 우리는 파트너를 골라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춤이 아니었다. “하나, 둘, 셋, 앞으로, 뒤로, 모으고...” 하고 외며 발을 ‘올바른’ 곳에 옮겼지만 파트너의 발을 수없이 밟았다.

어른들은 하나의 완전한 동작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일련의 작은 동작들을 암기함으로써 배우려 한다. 그래서 스키를 배울 때에도 머리 속에 그린 발자국을 따라 움직이려 한다. 처음에는 잡지 기사, 강사, 스키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은 친구 등 외부에서 스키를 ‘올바로’ 타는 법에 대한 개념을 찾는다. 그리고 이런 개념에 정신을 집중하고 그대로 따라 하려 한다. 그러는 것이 몸의 운동 감각을 억제하는 것임을 모른 채. 벤은 이와 정반대로 했고, 그래서 그렇게 쉽게 배웠다.

내가 초보자일 때 스키를 타는 ‘올바른’ 법은 부츠가 서로 닿도록 두 다리를 붙이는 것이었다. 스키에 관한 책들도 한결같이 패럴렐 회전을 하고 몸을 그런 자세로 유지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다리를 붙이고 타면 잘 타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뗑이었다. 나는 이 개념을 표준 삼아 스키를 탔다. 내 몸이 이 개념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이 개념이 나에게 알맞은 것인지 아닌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내 몸이 어떻게 느끼건 상관하지 않았다. 스키를 ‘올바로’ 타고 싶은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몇 년 동안 그런 자세로 스키를 타자 불편함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그런 자세가 자연스러워져서가 아니라 버릇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몸의 느낌을 무시하고 겉모습에만 신경썼다.

우리는 원칙을 지킴으로써 배우고, ‘올바른’ 방법과 얼마나 가까운지를 바탕으로 우리의 실행을 판단한다. 개념화된 회전이 좋은 것은 그것이 올바른 방법으로 느껴지고 실제로도 잘 되기 때문이 아니라 표준에 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념에 따라 움직이면 기계적으로 움직이게 되고, 그런 움직임은 부자연스럽게 마련이다. ‘경험’이 아닌 ‘생각’에 따라 움직이면 배울 수가 없다. 그러면 자아 2가 모든 동작의 미묘함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그에 따라 더 이상 발전할 수가 없다.

스키가 어디 있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보다 스키가 어디 있는지를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어때야 한다’에 너무 집착하여 ‘현재 상태’를 게을리하면 좌절하고 분노하고 낙담하게 된다. 이런 감정이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며, 그것을 올바로 하는 법에 대해 선입견이 없다.

‘어때야 한다’는 부정적인 개념이다. 정신적 훈련법을 쓰면 옳은 방법이 그른 방법일 때가 많음을 알 수 있다. 개념은 어떤 방향을 제시해 주기는 하지만, 어떻게 할 때 편하고 자연스러운지를 바탕으로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방법을 택해야 한다. 현재 상태에 주의를 집중하다 보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저절로 깨달을 수 있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부모와 친구들과 사회의 ‘어때야 한다’에 이끌려 산다. 올바르게 사는 법, 올바른 직업, 올바른 생활, 올바른 관계 등. 우리는 우리의 직관과 지각과 관심에 따라 선택하지 않고 이런 것들에 순응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패를 겪었다.

 


경험에 의한 학습

 


빌리의 어머니가 벽난로를 가리키며 말한다. “저 불 보이지? 아주 뜨거우니까 조심해야 한다. 잘못하면 손을 심하게 데거든. 불 가까이 가지 말아라.” 토미의 어머니는 토미를 벽난로 가까이 데려가서 손을 잡고 불 쪽으로 내밀며 말한다. “조금만 더 내밀어 보렴.” 토미는 손을 내밀다가 뜨겁게 느껴지는 곳에서 멈춘다. “뜨겁지?” 토미가 손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보고 토미의 어머니가 말한다. “불은 뜨겁단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데게 되지.”

불의 위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첫 번째 아이는 불에 대한 개념을 머리 속에 집어넣고 있다가 불 가까이 있을 때마다 불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러나 불의 뜨거움을 직접 느껴 본 토미는 불은 뜨거우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안다. 빌리는 불 가까이 가는 것을 어머니가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고, 토미는 불의 위험이 불에 얼마나 가까이 접근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빌리는 불을 두려워하게 되었지만, 토미는 불을 존중하게 되었다. 토미는 장차 불의 유용함을 깨닫고 그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뭔가를 기억하려고 애써야 하는 것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빌리는 다른 생각들과 개념들로 머리 속이 꽉 차 있으므로 머지않아 어머니의 경고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불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여 그 뜨거움을 느끼고, 그제야 불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개념을 바탕으로 배울 때보다 경험을 바탕으로 배울 때 훨씬 더 확실하게 배울 수 있다. 개념에 의한 학습은 자아 1에서 시작하여 자아 1에서 끝나지만, 지각은 자아 2로 배우는 것이다. 게다가 거의 모든 행동은 그에 대한 어떤 설명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그저 뜨겁다는 말로만 불을 설명할 수 없듯이, 스키는 단순히 무릎을 굽히고 다리를 붙이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없다. 하나의 행동은 여러 동작이 조화롭게 이루어진 것이다. 스키를 회전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동작을 기계적으로 암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물며 모든 지시 사항을 관련 근육들에 전달하여 회전 동작을 하게 하는 것은 더욱더 불가능하다.

자아 2는 깨달음을 통해 배운다. ‘행위에 대한 생각’이 아닌 ‘행위’를 통해 배운다. 자아 2는 탐험가처럼 늘 주변 환경을 미개척지로 여긴다.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이 많아서, 마주치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다. 어디로 가고 싶다거나 무엇을 성취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을 수는 있지만, 목표를 어떻게 이룰 것이며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을 겪게 될지 미리 예상하거나 기대하지 않는다.

자아 2는 경험을 길잡이로 삼는다. 객관적인 태도와 깊은 관심을 잃지 않고 매순간 일어나는 일을 양분으로 삼아 성장한다. 새로운 것을 감지하고 관찰하면서 끊임없이 정보를 수집하여 행동과 방향을 적절하게 수정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점점 커진다. 경험으로 깨닫는 것이야말로 자연스러운 학습이다.

 


멍하게 바라보기

 


아이들은 처음 보는 기술을 보면 몇 분 동안 완전히 정신이 팔려서 지켜본다. 눈을 크게 뜨고 멍하게 바라보면서, 눈에 보이는 것을 여러 부분으로 쪼개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아이들이 흉내를 잘 내는 것은 경험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하나의 동작을 일련의 정지 자세로 나누어 보고, 이것들을 자신에 대한 지시 사항들로 해석한다. “아, 알겠다. 계곡 쪽 스키의 에지를 세우고, 폴을 찍고, 산 쪽 스키로 체중을 옮기고, 그대로 회전을 하는군.” 몸이 이런 지시 사항들을 따르게 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스키의 회전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회전은 그 부분들의 합 이상의 것이다. 즉, 리듬, 부드러움, 균형, 조화 따위가 추가되는 것이다. 자아 1은 이런 것들을 모른다. 기계적으로 스키를 타면 로봇처럼 움직이게 된다.

아이들은 직선적으로 배우지 않는다. 전체론적으로 배운다. 차분하고 열린 정신으로 전체적인 이미지를 받아들인다. 시각적인 이미지뿐만 아니라 느낌까지 받아들인다. 정신을 집중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느낌을 갖는 것이다. 그러면 자아 2가 그 느낌에 상응하는 운동 감각을 몸 안에 만들어내고, 그에 따라 동작을 보면서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다. 아이들은 자기 비판을 모르므로 자신이 본 것을 모방하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모든 감각이 동작에 집중된 채 경험에서 자세한 정보를 끊임없이 끄집어낸다.

갓난아이는 걸음마를 처음 배울 때 넘어지지만, 넘어질 때 넘어지는 것에 대한 모든 정보를 몸으로 흡수한다. 갓난아이의 자아 2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다음 걸음을 조정한다. 보폭을 더 크게 하거나 작게 하고, 머리를 똑바로 세워 균형을 잡는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몸이 더 자세한 정보를 흡수하므로 새로운 동작을 다듬을 수 있다. 배움이 이루어지는 것은 몸이 균형을 잡았는지 잃었는지 말해 주는 미묘한 감각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정신이 차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정신적 훈련법의 기본 원리이며 자연스러운 학습의 본질이다. 배움의 질은 경험에서 흡수하는 정보의 질과 정비례한다. 끊임없이 걱정하고 비판하고 비교하는 정신은 막힌 여과기가 공기의 유입을 막듯이 정보의 흡수를 막는다. 정신이 활발할수록 몸은 더 적은 정보를 흡수하게 되고, 그에 따라 배움이 더뎌진다. 자연스러운 학습의 비결은 자아 1의 정신적 활동을 억제하여 지각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몸의 인식

 


스키를 타면서 우리는 지형에서 시각적 정보를 흡수하고, 스키가 눈과 접촉하여 나는 소리에서 청각적 정보를 흡수한다. 그러나 몸의 움직임에 대한 인식에서 가장 많은 것을 배운다. 얼마나 배울 수 있느냐는 바로 이 인식에 주의를 집중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몸의 인식이란 무엇일까? 다음의 간단한 운동을 통해 직접 경험해 보라.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가 내린다. 다시 들어올린다. 이번에는 손을 들어올릴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주의한다. 다시 손을 내린다. 이 두 번의 동작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이었는가? 이번에는 보다 쉽게 느낌에 주의를 집중할 수 있도록 눈을 감고 손을 들어올린다. 팔이 움직인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팔이 어디에 있는지를 무슨 느낌으로 알 수 있는가? 팔을 들어올릴 때와 내릴 때의 느낌을 구별할 수 있는가? 주의를 집중해 보면, 팔의 위치가 달라질 때 몇몇 근육은 수축되고 몇몇은 이완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팔을 들어올릴 때 어떤 근육들이 수축되는지 보라. 팔을 내릴 때 이 근육들이 이완되는 것을 느낄 수 있는가?

긴장을 풀고 주의를 집중할수록 몸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근육과 힘의 변화를 더 잘 느낄 수 있다. 몸의 다른 부분들을 가지고도 실험해 보라. 정신의 집중력이 높을수록 더 미묘한 느낌을 감지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회전을 몇 번 한 사람에게 무엇을 경험했는지 물어 보곤 하는데, 흔히 그 대답으로 ‘경험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폴을 제대로 찍지 않았어요.”

“폴을 제대로 찍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압니까?”

“느낌이 그랬거든요.”

“무슨 느낌이었죠?”

“팔과 어깨가 뻣뻣했어요.”

“그게 바로 경험입니다. 팔과 어깨가 뻣뻣한 걸 느낀 거죠. 그 밖에 당신이 말한 건 다 생각일 뿐이에요.”

지각은 뭔가를 직접 경험하는 것이고, 생각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을 개념화하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전혀 다른 두 과정이다. 경험에 대해 생각할수록 경험을 잘 지각할 수 없다. 생각이 많아지면 지각은 줄어든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 상대방을 똑바로 쳐다보며 상대방의 이야기에 주의를 집중하면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상대방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하거나 상대방의 이야기에 어떻게 대답할지 궁리하는 데 몰두하면, 상대방이 나에게 전하는 이야기를 잘 알아들을 수 없다.

 


두 가지 보기

 


어느 날 팀 갤웨이는 스키 강사들을 모아 놓고 정신적 훈련법의 원리를 초보 스키어들을 가르치는 데 응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게 되었다. 먼저 그는 초급반이 강습을 받는 모습을 지켜본 다음, 스키를 타 본 적이 없는 학생 열두 명을 맡았다. 테니스 코트 밖에서는 누구를 가르쳐 본 적이 없는 그는 상당히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초급반에서 맨 먼저 배우는 것은 엎걸음으로 비탈을 올라가는 법이었다. 팀도 이 과정을 따랐다. 하지만 옆걸음으로 비탈을 올라가는 법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스키를 신자, 가만히 서 있으면서 긴 스키에 익숙해지라고만 했다. 한 발에서 다른 발로 체중을 옮겨 보고, 발을 들어올렸다 내려놓았다 해 보고, 옆으로 벌려 보고,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해 보고, 에지를 세웠다 내렸다 해 보라고 했다. 학생들은 스키를 신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저마다의 방법으로 경험해 보았다. 옮고 그름은 없었다. 그저 새로운 것을 경험할 뿐이었다. 몇 분 뒤, 팀은 학생들에게 따라오라면서 경사가 완만한 슬로프를 옆걸음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생들이 도대체 자신이 ‘제대로’ 따라 하고 있는 것인지 걱정하기 시작하기도 전에 말했다. “가장 중요한 건 스키를 느끼는 겁니다. 비탈을 올라갈 때 스키 밑바닥이 경사면에 붙어 있습니까, 비스듬히 세워져 있습니까? 제 스키나 여러분 스키를 보지 말고 느껴 보세요.”

학생들은 끙끙거리며 옆걸음으로 비탈을 올라가려고 ‘애쓰기’를 멈추고 스키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탈을 올라가면서 자신의 스키가 경사면과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얼마쯤 올라갔을 때 팀이 학생들을 멈추어 세우고 에지를 조정해 보라고 했다. “스키를 보지 말고 스키 밑바닥을 경사면에 눕히면 어떻게 되는지 보세요.” 학생들은 그의 말대로 했다가 밑으로 슬슬 미끄러지기 시작하자 자동적으로 에지를 세워 멈추어 섰다. “여러분이 옆걸음으로 올라가면서 스키의 에지를 세운 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아무도 에지를 세우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다들 그렇게 했습니다. 일반적인 스키 교실에서라면 스키의 에지를 세우라는 말을 들었을 테고, 또 그렇게 하려고 애썼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도 저절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뭔가가 무척 똑똑한 겁니다. 이제 스키를 배우다 보면 그 뭔가를 더욱더 믿게 될 겁니다.”

“이제 에지를 최대한으로 세워 보세요...그 만큼의 각도를 5라고 합시다. 그보다 적으면 4, 더 적으면 3, 그리고 스키 밑바닥이 완전히 누우면 0입니다. 이제 계속 옆걸음으로 올라가면서 자신이 느끼는 에지의 각도에 해당하는 숫자를 부르는 겁니다. 올바른 숫자는 없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면서 에지의 각도가 얼마나 되는지 느끼며 숫자를 부르세요. 스키를 보면 안 됩니다. 느낌으로 하세요.” 학생들은 숫자를 부르며 슬로프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집중력이 높아졌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에서 걱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의 느낌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숫자가 1에서 4까지 오락가락했지만, 조금 지나자 저마다 자신만의 숫자를 발견한 것 같았다. 슬로프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 팀은 학생들을 멈추어 세우고 가장 많이 부른 숫자가 무엇인지 물었다. 거의 다 2나 3이라고 대답했다. 한 아가씨는 3이 가장 좋은 것이냐고 물었다. 팀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느 숫자가 가장 좋은 건지는 나도 모릅니다. 3이 잘 된다는 걸 어떻게 알았죠?”

“그냥 잘 되던데요. 3이 옳은지 아닌지는 몰랐어요.”

“그럼 지금은 3이 당신한테 알맞은 겁니다.”

그것이 시험이 아니었다는 것에 다들 안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발견하게 해 준 팀의 뜻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별다른 노력도 없이 이미 옆걸음을 배웠고 스키를 어느 정도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장차 스키를 타는 데 기초가 될 에지 세우기의 기본 감각을 터득했다.

그 다음날 팀이 고급반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이 ‘몸의 인식’의 원리가 얼마나 간단하면서도 보편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 학생들 가운데 페터 크로니히라는 스키 강사가 있었다. 체르마트에서 온 그는 20년 동안 스키를 가르친 사람이었다. 우리 넷은 중급자용 슬로프에서 탔는데, 몸에 주의를 집중하되 어느 부분에 주의가 가장 많이 쏠리는지 보라는 말만 들었다. 우리는 슬로프를 반쯤 내려갔을 때 어느 부분에 주의가 쏠렸는지 한 명씩 돌아가며 말했다. 나는 회전할 때 무릎이 얼마나 굽혀지는지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무릎에 주의가 쏠렸었다. 팀은 어깨의 회전이라고 말했다. 페터는 좀 따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글세, 나는 항상 에지에 신경쓰는데요.” 그는 자신감에 차 있는 것 같았다. 이너 스키가 그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팀은 자기는 어깨에 더 주의를 집중해 보겠다면서 각자 주의가 쏠리는 부분에 더 주의를 집중해 보자고 했다. 그리고 그 전날 초보자들에게 했던 말을 페터에게 그대로 해 주었다. “페터, 당신은 에지에 신경쓰는 것 같은데 주의력을 더 높여 보지 그래요. 에지를 최대한 세운 상태를 10, 완전히 누운 상태를 0으로 정하고 회전할 때마다 적당한 숫자를 부르는 거예요.”

다들 슬로프에서 내려왔을 때, 페터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도 어려웠다. “정말 놀라워요!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어요. 아주 작은 차이도 구별할 수 있었다니까요. 7일 때에는 눈부신 광명이었고 0일 때에는 캄캄한 암흑이었어요. 정말 놀라워요.”

광명과 암흑에 대한 말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우리는 평생 동안 스키를 타서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페터가 새 장난감을 선물받은 어린아이 같다고 느꼈다. 그는 모든 경험이 새롭게 느껴지게 하는 지각의 비밀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몸을 인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능력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더 미묘해질 뿐이다.

 


결과에서 배운다

 


자연스러운 학습은 몸으로부터의 정보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효과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처음 스키를 탈 때에는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동작이 많다. 우리 몸은 빠른 속도로 눈밭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데 적합하지 않고 걷거나 달리는 데 적합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팀은 초보자들을 가르칠 때 몸의 미묘한 감각에만 주의를 집중하지 말고 결과에도 주의를 기울이라고 말했다. 에지가 3일 때와 0일 때의 느낌의 차이를 느끼는 데 그치지 말고, 에지를 세운 정도에 따른 효과의 차이에도 주의를 기울이라고 했다.

자아 2는 근육의 움직임에 대한 느낌과 그 움직임의 결과 모두에서 정확한 정보를 얻어야 적절한 교정을 할 수 있다. 어떤 결과를 목표로 너무 노력하면 자신이 이루고 있는 일을 느끼기가 훨씬 더 어려워지고, 그에 따라 적절한 교정을 할 수 없게 된다. 넘어지게 만든 동작을 했을 때 의식적으로 그 동작을 바로잡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몸의 균형을 잃게 만든 동작과 넘어진 것을 느끼면 자아 2의 자동적인 학습 과정이 교정을 하기 때문이다. 의식적인 자아 1만 믿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이것이 잘 믿어지지 않겠지만, 몸이 필요한 정보만 주어지면 스스로를 바로잡을 줄 안다는 것을 조금만 실험해 보면 알 수 있다.

팀은 테니스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서브로 표적을 맞히는 법을 가르칠 때 표적을 맞히려고 애쓰지 말라고 말한다. 서브한 공이 표적을 기준으로 정확하게 어디에 떨어지는지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서브한 공이 표적 오른쪽 1.5미터 지점에 떨어졌을 경우, 더 왼쪽을 겨냥하라고 하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바로잡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다시 서브를 해 보라고 한다. 자아 2가 교정을 하도록 믿는 것이다. 자아 1은 몸이 자신의 도움 없이도 표적을 맞히는 법을 금방 배우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이 원리는 스키에도 적용될 수 있다. 회전이 끝날 때 스키 밑바닥이 눈에 붙으면 어떻게 되는지, 에지를 약간 세우면 어떻게 되는지, 에지를 많이 세우면 어떻게 되는지 느껴야 한다. 자아 2는 에지를 세우는 것과 그것이 회전의 질에 끼치는 영향을 인식하여 이 둘 사이의 최적 관계를 발견한다. 그러나 지형과 속도는 수시로 달라지므로 이 최적 관계도 수시로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럼 스키에서 표적은 뭐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다. 스키에서의 바람직한 목표는 테니스나 골프처럼 점수를 매기는 스포츠에서처럼 분명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인식할 수는 있다. 어떤 지형과 어떤 속도에서도 균형을 유지하는 것도 목표의 하나이다. 균형은 모든 동작에서 필수적인 것이며, 몸은 특히 스키를 탈 때 균형을 이루려는 강한 욕망을 품는다. 그리고 몸은 이 목표를 이루는 법을 자아 1, 즉 개념적인 정신보다 훨씬 더 잘 안다.

 


지각이 통제력을 높인다

 


스키어들이 흔히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다. 몸의 인식력을 높이기 위해 기술적인 정보를 소홀히하면 능숙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이다. 우리 몸에 대한 인식에서 얻는 복잡한 정보는 아무리 정확한 말로 표현된 가르침보다 훨씬 더 미묘하고 정교하다. 어떤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회전을 만들어내는 에지 세우기의 정도를 누가 말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몸의 언어는 너무나 정교하고 세밀하여 말로 옮길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 몸에 귀를 기울이고 미묘한 운동 감각에 주의를 집중하면 몸의 언어를 배울 수 있다.

스키를 탈 때 우리 몸의 지각에 주의를 집중하는 능력을 키우려면 약간의 연습이 필요하다. 이 훈련의 1차적인 목표는 자아 1을 잠재움으로써 의식적인 생각을 억제하고 우리 몸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느끼는 것이다. 이 과정을 촉진시키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다음에 설명한 두 가지 방법이 특히 효과가 크다.

몇 년 전 레이크엘도라에서 스키를 탈 때였다. 스키 교실의 톰 워커 교장이 나더러 눈을 감고 회전을 해 보라고 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슬로프가 비교적 평평하고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불안했지만 나는 해 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해 보았더니 너무 긴장되고 겁이 나서 공포에 질린 내 정신밖에는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자아 1이 쉴새없이 떠들어 댔다. “조심해! 그러다가 넘어지겠어.” 나는 겨우 두 번 회전하고 나서 눈을 뜨고 겸연쩍게 웃었다.

“다시 한 번 해 볼래요? 익숙해지려면 보통 몇 번 해 봐야 해요.” 톰이 말했다.

이번에는 긴장을 좀 풀 수 있었다. 그리고 곧 발에 주의를 집중할 수 있었다. 발이 스키와 하나가 된 것 같았고, 발밑 지형의 미세한 변화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뜬 다음에도 높아진 지각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전에 이룬 적이 없는 통제력을 갖게 해 주었다. 나는 에지 각도의 미세한 변화도 느끼게 되었다. 내 몸은 에지를 얼마나 세워야 하는지 아는 것 같았다. 전에는 가능하다고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힘을 적게 들이고도 더 정확하게 회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중에 톰은 부츠의 버클을 풀고 타 보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최대한의 통제력을 얻기 위해서는 부츠를 꽉 조여야 한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미심쩍어하면서 머뭇거리며 출발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회전을 하기 위해 갑작스러운 동작을 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발이 부츠에서 빠져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발바닥에 주의를 집중하고 발바닥이 스키를 통제하게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까 미세한 압력의 변화도 감지할 수 있었고, 그런 미묘한 차이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통제력을 높일 수 있었다. 몸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발에 힘을 주기만 했는데도 스키가 내 뜻대로 움직였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흔히 아이들에게 무술을 배우게 한다. 무술이 몸의 미묘한 감각에 대한 민감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태극권을 보면 모든 동작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이루어진다. 동작과 미묘한 기의 흐름에 대한 지각력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태극권에 능통한 사람은 지각의 부산물인 민감성과 통제력이 놀라울 만큼 뛰어나다.

서양에서는 의식과 성취가 서로 별개인 것처럼 의식보다 성취를 더 중시한다. 그러나 의식은 성취와 직결되는 것이다. 어느 스포츠에서나 몸의 미묘한 신호-이를테면 균형과 불균형, 적시와 부적시, 지나친 긴장과 지나친 이완 사이의 미묘한 구분선-에 주의를 집중하는 능력이 있는 선수가 두각을 나타낸다.

더 큰 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값진 일이며 서양의 스포츠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왔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너무 이 목표를 중시해 왔기 때문에 의식을 위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성취하려는 의지가 없는 의식은 방향이 결여돼 있다. 그러나 의식 없이 성취하려는 의지는 억지스러운 것이며 큰 성취에 필수적인 세밀함이 결여돼 있다. 인체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미묘한 메시지를 보내는 놀라운 기구이다. 이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이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으며 무슨 일이든지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목표에 집착하여 행동의 결과에만 신경을 쓰면 우리 몸과의 연결선이 끊어지게 된다. 몸의 메시지에 대한 인식력을 잃으면 행동에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몸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변화를 강요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정신적 훈련법에서는 변화시키려는 것에 대한 인식력을 높임으로써 진전이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인식력 또는 지각력을 높임으로써 심장 박동수를 낮추거나, 혈압을 낮추거나, 소화를 촉진시키는 등 몸에 대한 통제력을 크게 높이는 방법을 배웠다. 나는 손가락 끝의 온도를 높이는 실험에 참여한 적이 있다. 손가락을 전기피부반응기에 올려놓고 햇빛이 손가락을 내리쬔다는 상상을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손을 난로 속에 집어넣는 상상을 했다. 그런데 오히려 수치가 5나 내려갔다. 이번에는 손가락을 뜨거운 물에 집어넣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러면서 혈관을 통해 손가락으로 열을 보내려고 애썼다. 아무 효과도 없었다.

실험자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손의 온도가 느껴집니까?”

“아뇨.”

“손의 온도를 느껴 보면서 어떻게 되는지 보세요.”

나는 눈을 감고 손가락 끝에 주의를 집중했다. 그리고 온도를 높이려고 애쓰지 않고 온도가 얼마나 되는지 느끼려고 애썼다. 그러자 곧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의식적으로 목표에 도달하려고 애쓰지 않았지만 손가락의 온도가 높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떠 보았더니 수치가 5나 올라가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손가락의 온도를 마음대로 높이거나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지각력이 높아지면 스키를 탈 때에도 몸을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다. 스키를 잘 타게 될수록 높은 속도에서 몸의 균형과 컨트롤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미세한 조정을 해야 하므로 지각력이 한층 더 예민해야 한다. 특히 회전 활강 선수들에게는 더욱더 그렇다. 1위부터 5위까지는 시간차가 10분의 1초 단위에 지나지 않으므로 고도의 정밀도가 요구된다. 에지의 각도가 아주 조금만 과도하거나 모자라도 활강선이 달라지게 된다. 경기에서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코스에서 이탈할 수도 있는 것이다.

리처드 바흐의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Jonathan Livingston Seagull)’을 보면, 시속 345킬로미터로 다이빙하는 법을 터득한 조나단 리빙스턴이 고속에서 회전하는 법을 터득하려고 애쓸 때 미묘한 몸의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날개 끝 깃털 한 개를 1센티미터만 움직여도 엄청난 속도에서 부드러운 회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것을 깨닫기 전에는 그런 속도에서 깃털을 한 개 이상 움직이면 총알처럼 핑핑 돌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평가는 지각을 가로막는 장애물

 


산에서건 어디서건, 지각력을 높이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나 스키 실력을 좋다거나 나쁘다고 평가하는 버릇을 버리는 것이다.

방금 한 회전을 평가할 때에는 너무 과거에 집착하여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인식할 수 없다. 이미 지나간 일이 된 회전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에는 자신의 몸이나 스키를 느낄 수 없으므로 앞에 있는 지형을 정확하게 볼 수 없다. 그래서 몸이 뒤로 기울어지게 되고, 방금 한 회전에서 얻은 정보에 빨리 대처하지 못한다. 정신이 딴 데 가 있기 때문이다. 회전이 ‘좋았다’고 평가하면, 자아 1이 축하한다면서 또 그런 회전을 할 수 있도록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려 한다. 물론 이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회전이 ‘나빴다’고 평가하면 자아 1은 호통을 치면서 문제를 분석하고 바로잡으려 한다. 그러나 ‘좋다’고 평가했건 ‘나쁘다’고 평가했건 둘 다 좋지 않다. 반복하거나 바로잡으려고 애쓰게 되기 때문이다. 자아 2는 방금 한 회전에서 평가가 아닌 자세한 정보를 필요로 한다. 그래야 잘못된 점을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보울링을 해 보았다면 공이 스트라이크 코스로 들어가지 않는 것을 보고 화를 내며 얼른 뒤돌아서는 사람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자신이 던진 공이 얼마나 빗나가는지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발전할 수가 없다. 한 번도 넘어진 적이 없는 스키어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실수라고 말하는 경험은 실은 소중한 정보이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우리 몸이 우리에게 알맞은 것과 알맞지 않은 것을 구분하여 적절한 교정을 하는 것이다.

실수는 배움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능숙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스키를 잘 타건 못 타건 실수를 하게 마련이지만, 실수에서 배울 수 있다. 우리가 없애야 할 것은 실수가 아니라 실수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그에 따른 평가와 비판과 분노이다. 실수를 받아들이면 실수가 적어진다. 더 나아가, 처음에는 우리의 실행만 평가하지만 나중에는 우리 자신을 평가하게 된다. 비판은 힘을 가지고 있다. 체중을 빨리 옮기지 않으면 ‘나쁜’ 회전을 하게 되고, 이것은 곧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켜서 스키를 잘 못 타게 되며, 그에 따라 더 많은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킨다. 그러면 하루를 망치게 되고, 그런 날이 몇 번 반복되면 ‘나는 스키 실력이 형편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이런 낙담과 좌절은 스키장에서 떠나 온 뒤에도 오랫동안 가슴 속에 남아 있다가 우리를 ‘형편없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런 자기 평가는 지각을 왜곡하고 실행을 방해하며, 배우고 실행하는 능력을 억제한다. 재미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로 그런 하루를 보내게 된다. 자신이 정체 상태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기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할 때까지 정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스키를 잘 못 타는 사람은 없다. 사람마다 육체적 및 정신적 발달 정도가 다를 뿐이다. 활짝 핀 꽃이 꽃봉오리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다른 성장 단계에 있을 뿐이다.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는 버릇을 버리면 우리 자신을 믿을 수 있으며, 보다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스키를 탈 수 있다.

햄릿은 로젠크란츠와 길덴슈테른에게 이렇게 말했다. “좋은 것이 있고 나쁜 것이 있는 게 아니오. 그렇게 생각할 뿐이오.”

 


불신

 


지각과 자연스러운 배움에 대한 또 다른 장애물은 자아 2에 대한 불신이다.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의심할수록 자신을 가르치면서 애쓰게 된다. 또한 자아 1이 우리 몸에게 그 스스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시키면 몸으로부터의 정보를 인식하기가 어렵다.

스키에서는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므로, 이 일을 자아 1에게 맡길 것인지 자아 2에게 맡길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누구나 멈추어 서지 못하고 슬로프 가장자리에 처박히거나 툭 튀어나온 부분에 부딪혀서 넘어진 경험이 있다. 한쪽 스키에 체중을 실은 채 공중에 붕 떠 있다가 팔이나 다리를 반대쪽으로 허우적거려 간신히 균형을 잡곤 한다. 이런 일은 너무 빨리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반응한다. 우리가 뭘 어떻게 했는지 깨달을 새도 없다. 우리가 균형을 잃는 순간에 자아 2가 자동적으로 다섯, 열, 스물다섯, 또는 그 이상의 교정을 하여 우리 몸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다. 이렇게 정교한 일을 자아 1이 해 낼 수 있을까?

 


록 댄스

 


우리 몸을 믿고 그것을 통제하고 조종하려 하지 않으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내가 기획한 1년짜리 강사 양성 과정의 마지막 회의에서, 우리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에서 1주일 동안 배낭을 메고 등산을 하기로 했다. 가장 높은 봉우리의 하나를 오를 참이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출발하여 정오에 정상에 도착했다. 정말 힘든 등반이었다. 우리는 포도주에 치즈를 먹고 기운을 차린 다음 하산하기 시작했다.

한참 내려가자 거대한 바위들이 깔려 있는 곳이 나왔다. 우리는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건너뛰며 내려갔다. 그러기를 반복하자 점점 속도가 붙었다. 나중에는 어느 바위로 어떻게 건너뛸지 생각할 시간도 없을 만큼 빨라졌다. 의식적으로 컨트롤할 생각을 버리고 우리 몸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나는 듯이 산을 내려간 것이다. 내 주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집중돼 있어서 지각과 행동, 느낌과 실행 사이에 아무 생각도 없었다. 처음에는 좀 무서웠지만, 내 몸이 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내 몸을 더 믿게 되었다. 그러자 두려움이 환희로 바뀌었다. 마치 내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없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컨트롤을 유지하려면 컨트롤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모순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것은 자아 1의 컨트롤을 내던지고 자아 2가 컨트롤하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참선을 통해 훈련하는 궁사(弓士)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활을 쏘는 게 아니라 활이 스스로 쏘는 것이다.”

몸과 스키를 마음대로 컨트롤하려면 먼저 가장 큰 정신적 장애물인 두려움에 맞서 극복해야 한다.

Posted by Curati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