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ner Skiing Part. 2

2008. 12. 4. 00:47 from Favorite/Ski


Inner Skiing

by Timothy Gallway and Bob Kriegel

번역: 태극스키도장 설문


 
 

 

 


제2장: 자아 1과 자아 2

 


한계를 돌파하는 순간

 


왠지 모든 게 다 잘 되는 것 같고 평소보다 스키를 훨씬 더 잘 타서 스스로 놀랄 때가 있다. 그렇게 어렵던 회전이 갑자기 쉽다. 그동안의 좌절의 순간들이 모두 잊혀지면서 가슴 벅찬 기쁨에 도취된다. 모든 걸 제대로 해 봐야지, 지금 내 자세가 어떨까, 넘어지면 어떻게 하나,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이런 생각들이 말끔히 사라진다. 너무나 기뻐서 실수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도 실수하지 않는다. 정신이 맑고 편안하다. 스스로 지운 한계를 잠시 잊어 버리고 무의식적으로 스키를 탄다.

이럴 때 우리는 꽉 조이는 부츠, 시려운 손, 길게 늘어선 줄, 마음대로 스키를 잘 타지 못하는 데 대한 불만 따위를 모두 잊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런 멋진 순간을 즐기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슬로프로 올라가게 된다.

스물두 살 된 여대생 잰은 자신은 운동 신경이 너무 둔해서 스키를 배울 수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나흘째 되는 날 그런 경험을 했다.

“처음으로 내 몸이 컨트롤되는 것 같았어요. 그 전에는 늘 주춤거렸고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어요. 나는 회전을 제대로 하는 법을 절대로 못 배울 것 같았죠. 하지만 그 한 번에 모든 불안이 사라졌어요. 처음으로 긴장이 풀리는 걸 느꼈어요. 그리고 왠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회전하거나 정지하는 게 쉬웠어요. 정말 믿어지지가 않았어요. 넘어지는 것도 전혀 무섭지 않았어요. 그 다음부터는 스키를 타는 것 같았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내가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사실 내가 뭘 어떻게 한 게 아니에요. 그냥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나는 그대로 따랐을 뿐이고요. 몸이 너무나 가볍고 자유로웠어요.” 잰은 아직도 그 때의 기억에 도취되어 있었다.

나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하루 종일 스키를 탔는데 그다지 잘 타지 못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타기로 하고 꽤 까다롭지만 너무 어렵지는 않은 슬로프에 올라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늘 그러듯이 곧바로 미끄러져 내려가지 않고 슬로프 꼭대기에 잠시 서서 적막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출발하여 회전을 몇 번 했는데, 뭔가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힘들이지 않고 저절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 같았다. 어디서 회전할지 미리 생각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았다.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산이 길을 가르쳐 주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적이었던 모걸이 오랜 친구처럼 느껴졌다. 모걸이 나타나면 평생 동안 그랬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회전하거나 뛰어 넘었다. 마치 산을 날아 내려가는 것 같았다. 내가 스키를 그렇게 탈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슬로프를 반쯤 내려갔을 때 내 앞에서 내려가는 사람이 보였다. 나는 20미터쯤 뒤에서 그가 내려간 길을 따라 내려갔다. 우리 둘은 소리없이 춤을 추듯이 미끄러지듯 산을 내려갔다. 밑에 도착했을 때 나는 기쁨에 넘쳐 활짝 웃으며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는 나보다 더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믿을 수가 없어요. 내가 이렇게 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우리는 바에서 서로의 성공을 축하했다. 뉴욕에서 온 외과 의사인 그는 아무 힘도 들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잘 타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분석하려고 애썼다. “수술을 할 때에도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문득 뭔가를 깨달은 느낌이 들면서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민해지는 거예요.”

이런 돌파 또는 비약의 순간은 누구나 살면서 어느 한 순간 경험하는 것이다. 농구에서 오직 게임에 몰두할 때의 느낌, 테니스에서 머리를 쓰지 않고 본능적으로 움직일 때의 느낌, 조깅이나 수영을 할 때 무아지경에 빠지는 느낌 같은 것이다. 흥겨운 음악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춤을 추는 느낌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육체적 활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떤 활동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뜻밖의 상황에서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이 문득 떠오르는 직관적인 깨달음이 바로 그런 것이다.

안타깝게도 스키를 비롯한 모든 활동에서 이루어지는 돌파 또는 비약은 의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연한 것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스키의 경우, 스키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에만 몰두하여 다음 회전이나 바로 전의 회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때 일어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돌파 또는 비약은 생각을 멈출 때에만 이루어진다.

이런 무념무상의 상태, 그 순간의 경험에 몸을 내맡긴 자연스러운 상태를 ‘머리를 쓰지 않고 스키 타기’라고 한다. 그러나 사랑에 빠져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런 이런 황홀지경을 유지할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깨지고 만다. 그럼 우리는 잃어 버린 감각을 되찾기 위해 여러 가지 기술을 쓴다. 하지만 그 짜릿한 흥분은 다시 느낄 수가 없다. 다시 머리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스키를 잘 타는 사람이건 잘 못 타는 사람이건 누구나 경험하는 이 돌파의 순간은 특징이 있다. 우리의 잠재력을 깨닫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은 천성적으로 운동 신경이 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경험은 부정할 수 없는, 좀 거북한 진리를 깨닫게 해 주기도 한다. 즉, 우리가 훨씬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최근에 스키를 많이 타지 않았기 때문이야, 강습을 충분히 받지 않았기 때문이야, 운동 신경이 둔하기 때문이야 따위 우리가 흔히 늘어 놓는 변명은 아무 근거도 없다. 스키를 잘 타지 못하는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스키를 잘 타게 된 것도 마침내 새로운 기술을 익혔기 때문이 아니라 잠시 마음가짐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평온해짐에 따라 자연스럽고 조화로운 동작이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너 스키의 비결은 기술의 숙지보다는 마음가짐에 있다고 하겠다.

스키를 우리의 입증된 잠재력만큼 잘 탈 수 있는 능력을 가로막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거북한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우리는 흔히 비약적인 발전이 행운, 상태가 좋은 눈, 새로 간 에지, 다른 사람의 조언 따위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드물게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머리를 쓰지 않고 타는 스키’는 달리기나 웃음만큼 자연스러운 것이며, 따라서 얼마든지 빈번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경험을 나보다 훨씬 더 많이 한 사람과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오티스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몸이 유연했으며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산 위에서나 아래에서 어떤 상황에 마주치건 자연스럽게 대처했다. 즐기기를 좋아하는 그의 태도는 늘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거나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탐구하고 시험하면서 극복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힘과 자신의 몸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천부적인 스포츠맨이었지만 나이에 비해 비범한 것은 아니었다. 도대체 그가 누구냐고? 그는 네 살 때의 내 맏아들이었다.

지금도 나는 달리고 깡충깡충 뛰고 기고 세발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 즐거워하는 모습과 자연스러운 동작에 경탄한다. 우리의 몸을 믿고 몸이 하는 대로 내맡기면 전혀 힘들이지 않고 쉽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아이들에게서 배웠다. 우리도 어릴 때에는 천부적인 스포츠맨이었다. 즐겁게 놀면서 우리의 몸을 움직일 때 편안함과 기쁨을 느꼈다. 어두워진 것도 모르고 놀다가 부모님이 들어와서 밥 먹으라고 몇 번 소리를 질러야 그만두곤 했다. 거의 날마다 즐거워하고, 웃고 울고, 무릎에 흙을 잔뜩 묻히고, 옷이 찢어지고, 팔꿈치가 긁히곤 했다. 누구나 아무 생각 없이 놀던 때였다. 비약적인 발전의 순간이 너무 많아서 미처 몰랐던 때였다.

우리 이너 스키 교실 강사인 캐리 배철더는 자기 반 학생들과 아이들 놀이를 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내가 산토끼가 되고 학생들이 사냥개가 됐어요. 학생들이 멍멍 짖고 으르렁거리면서 나를 잡으려고 쫓아 다녔죠. 그러다가 나중에는 체면이고 뭐고 다 잊어 버렸어요. 놀이가 끝나자 대학 교수인 테리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다시 애가 된 것 같았어요. 토끼를 잡는 데에만 몰두하여 스키는 까맣게 잊어 버렸어요. 그리고 그러다 보니까 스키도 더 잘 탄 것 같아요. 그렇게 재미있게 논 건 몇 년만에 처음이에요.’ 다른 사냥개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어요.”

테리를 비롯한 사냥개들은 토끼를 잡는 데 몰두하여 생각하지 않고 스키를 탈 수 있었다. 그래서 어릴 때처럼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일 수 있었고, 스키를 잘 타는 데 필요한 마음가짐을 되찾게 된 것이다.

 


비약에서 몰락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다음날 아침, 나는 외과 의사 친구를 다시 만났다. 실은 만난 게 아니라 거의 부딪힐 뻔했다. 그는 팔다리를 사방으로 벌린 채 모걸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자세로 넘어져 쭉 미끄러지면서 내 옆을 휙 지나갔다. 그러고는 이를 악물고 중얼거리며 천천히 일어나더니 눈 때문이라는 듯이 폴로 눈을 내리쳤다.

그는 점차 마음을 가라앉혔고, 우리는 함께 슬로프를 몇 번 내려왔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그 전날보다 잘 못 탔다. 그렇게 자연스럽고 유연했던 동작이 억지스럽고 뻣뻣했다. 자신이 없었고 낙담하고 있었다. 그 전날이 비약적인 발전이었다면 그 날은 몰락이었다.

나중에 숙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게 잘 됐는데 그 다음번에는 엉망진창이라니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러더니 곧 그 이유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 날 아침 그는 그 전날처럼 멋지게 타고 싶어서 슬로프를 내려오면서 스스로 다짐하기 시작했다. “체중을 앞에 둬야 해...에지를 좀 더 세우고...회전할 때 미리 산 쪽 스키에 체중을 옮기고...”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 다짐할수록 더 못 탔다. 그래서 그는 화가 나기 시작했고, 자신의 실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런 멍청이, 몸이 너무 뒤로 기울었잖아. 무릎을 더 굽혀야지.” 하지만 잘 해 보려고 애쓸수록 더 부자연스러워졌다. 마법의 순간이 사라진 것이다.

자신의 능력이 최대한 발휘될 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기분이 사라지면 당연히 되찾고 싶지만, 되찾으려고 노력하면 오히려 더 멀어질 뿐이다. 자연스러운 상태를 다시 만들어내려는 노력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그리고 이런 의문이 생긴다. 노력하지 않고 어떻게 성취할 수 있단 말인가?

비약적인 발전은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려고 애쓰는 것은 연기를 움켜잡으려는 것과 같다. 그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계속 시도해 보아도 좌절만 하게 된다. 우리의 노력하는 부분은 우리의 진정한 잠재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긴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노력하며 스키를 잘 타는 부분은 따로 있다. 우리의 이 두 부분에 대해 잘 알면 비약의 순간을 좀 더 자주 경험할 수 있다.

 


자아 1과 자아 2

 


스키를 탈 때 머리 속에 떠도는 생각들에 귀를 기울여 보라. 이건 이렇게 해야지, 그렇게 하면 안 되지 하고 끊임없이 떠들어 댄다. 자기 비판, 자기 분석, 걱정, 두려움, 의혹 따위가 머리 속에 가득 차 있다. 흔히 이런 잔소리는 끊임없이 계속되며 비우호적이다. 잠시 숨을 돌리고 이 잔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지시하고 비판하고 의심하고 있는가? ‘내가 나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일뿐’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겠다. 그럼 ‘나’는 누구이고 ‘나 자신’은 누구인가? 이 둘은 분명히 서로 다른 존재이다. 그렇지 않다면 서로 대화할 수가 없다. 어느 한쪽만 있다면 대화가 필요하지 않다. 말하는 사람이 무슨 말이 나올지 이미 알고 있으므로 그 말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과 일체가 되어 있을 때에는 내면의 대화가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내면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이야기하고 비판하고 걱정하고 의심하는 목소리는 자아 1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 자아 1이 자아 2에게 지시한다. 자아 2는 모든 활동을 수행하는 우리의 몸과 그 잠재력이다. 자아 1은 모든 것을 통제하는 머리 속의 자아로서 우리에게 스키 타는 법을 가르쳐 주며, 잘 탄다고 칭찬도 하고 형편없다고 꾸짖기도 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 두 자아가 서로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래서 스키가 어려운 것이다. 만일 자아 1과 자아 2가 서로 다른 두 사람이라면, 이 둘의 관계가 상호협력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불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금방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아 1이 스키 및 다른 모든 것에 능숙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생각을 적게 할수록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을 수 있다. 갑자기 스키를 잘 탈 때, 자아 1은 여느 때와 달리 조용히 있다. 자아 1의 통제가 우리 몸 안의 선천적인 비언어적 유도 체계로 전달되고, 그에 따라 우리의 행동이 조용히 유도된다. 자아 1은 우리가 ‘머리를 쓰지 않을 때’ 스키를 잘 탄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기가 꺾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성공에 그다지 중요한 존재가 아니며 지나친 생각이 우리의 능력의 표출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자아 1의 목소리가 우리의 목소리가 아니라 평생 동안 쌓인 두려움과 의혹과 자의식 따위 갑작스러운 몰락을 일으켜서 스키를 잘 타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면, 우리는 더 이상 장비, 다른 사람들, 눈의 상태, 모걸 따위를 탓하지 않을 수 있다. 자아 1이 조용히 있으면 우리의 지각이 예민해지며, 어떤 상황에도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여 대응할 수 있는 자아 2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선천적인 잠재력인 자아 2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이미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비약적인 발전을 경험할 때마다 이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너 스키의 주목표는 자아 2의 표출과 발전을 방해하는 내면의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자아 2는 누구일까?

 


자아 1과 자아 2 사이의 차이를 규명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이 둘이 스키에 작용하는 영향력의 차이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코퍼 산에서 열린 이너 스키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자아 1의 통제에 따라 스키를 탈 때와 자아 2의 통제에 따라 스키를 탈 때의 느낌을 표현해 보라고 했더니 이런 말들을 늘어놓았다.

 


자아 1                              자아 2

애쓴다                              자유롭다

긴장한다                            즐겁다

기계적이다                          가볍다

지겹다                              상쾌하다

불안하다                            순조롭다

무섭다                              편안하다

산만하다                            여유롭다

몸부림친다                          침착하다

생각한다                            힘차다

기대한다                            차분하다

화를 낸다                           기민하다

무겁다                              놀란다

머뭇거린다                          유연하다

변덕스럽다                          신비롭다

예상한다                            훨훨 난다

멈칫거린다                          율동적이다

혼란에 빠진다                       물 흐르는 듯하다

맙소사!                             황홀하다

 


스키를 회전시키기 위해 해야 하는 행동들을 생각해 보자. 체중을 바깥쪽 다리로 옮긴다, 무릎과 발목을 앞쪽 안으로 굽혀서 에지를 세운다, 어깨와 팔과 손을 움직여 폴을 찍는다, 산 쪽 스키로 체중을 옮긴다... 이 밖에도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동작이 수없이 많다. 스키를 탈 때의 모든 동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스키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일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 몸의 신경계에서 여러 근육으로 수많은 즉각적인 지시가 전달되어야 한다.

그럼 누가 이 일을 할까? 그게 누구이건, 자신이 통제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고 “무릎을 굽혀야지, 이 멍청아!” 하고 소리를 질러 대는 잔소리꾼 자아 1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유능하다. 도대체 누가 멍청하단 말인가?

자아 2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잠재력을 말한다. 인도의 학자 스리 오로빈도는 그의 저서 ‘체육에 대해(On Physical Education)’에서 우리가 말하는 이 자아 2를 이렇게 표현했다. “생각하지 않고도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할 수 있는 본질적이고 본능적인 육체의 의식...정신의 신속한 통찰, 의지의 자발적이며 신속한 결정과 대등한 것이다.” 그러나 자아 2가 영적인 존재나 신비로운 존재는 아니다. 이것은 늘 우리 내면에 자리잡고 있으며, 우리가 정신 즉 자아 1의 간섭을 무시할 때 나타난다. 자아 2는 중추 신경계, 뇌, 기타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여러 가지 지각 기관으로 이루어진 기초적인 지성이다. 우리의 행동과 말,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의식적인 정신이 통제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작용이다.

자아 1은 아주 간단한 일을 하는 데에도 필요한 수많은 지시를 배울 수 없다. 하물며 그것들을 즉각 근육으로 전달하는 일은 더욱더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아 2는 갑자기 스키를 잘 탈 때뿐만 아니라 설거지, 못 박기, 옷 입기, 밥 먹기 따위 매우 일상적인 활동에서도 나타난다. 이런 간단한 일에도 얼마나 복잡한 과정이 필요한지, 알고 보면 참으로 놀랍다. 못 박는 일을 생각해 보자. 먼저 한 손의 손가락에 힘을 주어 못을 잡는다. 다른 손의 손가락으로 망치를 꽉 잡는다. 이 때 망치를 꽉 잡되 유연성을 잃지 않을 만큼 팔목에 적당한 힘을 준다. 그런 다음에 이두박근을 팽팽히 당겨서 팔꿈치를 굽히고 어깨를 회전시켜 팔을 쳐든다. 망치를 끝까지 쳐들었을 때 손목을 뒤로 젖힌다. 망치로 못을 내리치기 전까지의 준비 동작에만 이렇게 복잡한 과정이 따르는 것이다! 이 다음은 또 어떤가. 망치로 못을 정확하게 내리치기 위한 손과 눈의 복잡한 공동 작용이 따른다. 자아 1은 이런 비교적 간단한 일도 스스로 터득하지 못한다.

자아 2는 우리가 스스로의 잠재력을 억제하는 비뚤어진 자의식을 쌓기 전인 유년기에 가장 잘 나타난다. 어린아이는 자아 1의 최소한의 간섭만으로도 잘 배우고 실행한다. 좀 서툴기는 해도 모든 동작이 매우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끙끙거리며 애를 쓰거나, 진전이 없다고 스스로를 비판하거나, 자신의 동작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면 우리 어른들의 동작만큼 매우 부자연스럽게 보일 것이다. 우리의 부자연스러운 동작이 정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너무 오랫동안 그래 와서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자아 1은 누구일까?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떠도는 생각의 흐름에 잠시 귀를 기울여 보면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있다. 자아 1은 산 위에서 이런 잔소리들을 늘어놓는다.

“무릎을 굽히란 말이야.”

“계곡 쪽 스키에 체중을 실어야지.”

“형편없는 회전이었어. 에지를 더 세워야지.”

“넌 죽을 때까지도 못 배울 거야.”

“넌 스키에 소질이 없어.”

“가망이 없어.”

“이 슬로프는 너한테 너무 가파르다니까.”

“저 모걸 좀 봐! 틀림없이 벌렁 자빠질 거야.”

“겁 먹지 마. 저런 얼간이들도 하는데 너라도 못 하겠어?”

“스키를 나란히 붙이고 있어야 리프트 밑에서 남들이 보기에 멋있지.”

자아 1은 자신이 뭐든지 다 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스키 타는 법을 가르치고, 진전 정도를 평가하고, 실수를 비판하고, 우리의 능력을 의심하며 다른 사람들의 능력과 비교하고, 실패하거나 넘어질까 봐 안달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아 1은 여러 가지 역할을 맡는 다중인격체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강사: 뭘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지껄인다. “계곡 쪽 스키에 체중을 실어야지...아니, 그렇게 많이 실으면 균형을 잃지...이제 바깥쪽 스키 안쪽 에지로 체중을 옮기고 발목을 최대 경사선 밖으로 굽혀...” 지시하기를 멈추면 우리가 제대로 못 할까 봐, 그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자꾸자꾸 되풀이한다. “무릎을 굽혀, 무릎을 굽히란 말이야!” 그는 우리가 자기 없이는 스키를 배울 수 없다고 확신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억력이 나쁘다고 생각한다. 만일 자아 1의 수많은 충고와 조언에 사례를 해야 한다면 리프트 표를 살 돈도 없을 것이다.

구제불능 씨: 강사의 정반대인 구제불능 씨는 우리가 뭐든지 스스로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늘 문제를 예상하고, 우리에게 필요하건 불필요하건 도움과 조언과 정보를 요청하려 한다. 우리가 넘어지면 일어나서 다시 스키를 신으라고 하지 않고 누가 와서 도와 줄 때까지 눈밭에 그냥 누워 있으라고 한다. 그의 충고를 따르면 우리는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되고, 맨 나중에 슬로프를 내려오게 된다. 구제불능 씨와 강사는 극과 극이다. 전자는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가르침을 받으려 하며, 후자는 자신이 뭐든지 다 안다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가르치려 한다.

허영 씨: 허영 씨는 스키를 잘 타는 것보다 겉모습에 관심이 더 많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우리로 하여금 자의식에 사로잡혀 멋진 폼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멋있게 보이려고 애쓰게 한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다른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리프트 밑에서 스키를 타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슬로프가 너무 어려운 코스가 아니어야 하겠지만. 우리에게 찬사를 보낼 구경꾼들이 없으면 그는 바람 빠진 풍선에 지나지 않는다.

경쟁자 씨: 경쟁자 씨는 늘 우리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주변 사람들보다 더 빨리 더 멀리 타도록 애쓰라고 부추긴다. 그리고 스키장에 가장 빨리 가는 길과 장비를 가장 싸게 사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여유를 가지고 즐기려 하면 배신감을 느낀다.

두려움 씨: 두려움 씨는 넘어지거나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며, 우리의 몸과 마음이 상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가 즐겨 쓰는 말은 이렇다. “어어, 어떻게 하지...난 이런 데에서는 못 타겠어.” 늘 잔뜩 긴장하여 위험한 곳이 없는지 살피며, 우리로 하여금 몸이 나무 토막처럼 뻣뻣하게 굳게 만든다.

용맹 씨: 용맹 씨는 무사히 내려올 수 있는 슬로프에서 타는 것을 지겨워한다. 모험을 좋아하며 통제된 속도를 싫어한다. 산 꼭대기에서 밑까지 쏜살같이 달려 내려와야 성이 찬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대로 무턱대고 전문가용 코스를 쏜살같이 달려 내려오다가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다치게 된다.

무골충 씨: 이 사람은 신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는데도 우리가 거절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무슨 스포츠건 배울 수 없다고 단정하고, 이런 자신의 믿음이 맞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운동 신경이 둔한지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입시킨다. 그리고 행여 우리가 스키를 탈 줄 아리라고 누가 생각할지도 모르므로, 우리가 얼마나 운동 신경이 둔한지 사람들에게 미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누가 보고 있을 때 우리가 스키를 잘 타는 것이다. 그가 설정해 놓은 우리의 자의식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비평가: 비평가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한다. 우리의 회전이 99퍼센트 완벽했다고 해도 나머지 1퍼센트의 실수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의 현재의 능력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스키를 능숙하게 타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면 자신이 불필요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위에 묘사한 여러 가지 인격 중에 여러분의 자아 1에 해당하는 것이 몇 가지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밖에도 많이 있다. 심판관, 영웅, 초조 씨, 고참 상사, 트집쟁이, 구원의 천사 등등.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다. 자아 1의 여러 가지 인격을 분석하고 규명하는 데 너무 몰두하다 보면 정작 스키 자체에는 소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것도 자아 1의 또다른 인격, 즉 분석가이다. 우리로 하여금 좋지 않은 회전이나 넘어지는 것의 요인, 또는 또 다른 자아 1의 인격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게 하여 현재의 경험에 몰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자아 1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스키와 삶에 필수불가결한 존재라고 믿게 하려 하지만, 그의 끊임없는 잔소리는 우리의 활동에 방해만 될 뿐이다. 우리가 아주 잘 하고 있을 때 머리 속이 얼마나 맑고 차분한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갑자기 스키를 잘 탈 때의 우리의 정신은 지시하거나 비판하거나 평가하거나 분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직 현재에만 몰두할 뿐이다.

내가 스키를 탈 때 자주 나타나서 방해하는 자아 1의 인격은 허영 씨이다. 그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멋있게 보이기를 바란다. 보통 리프트 밑에서 스키를 탈 때 나타난다. 처음에는 스키를 타는 데에만 몰두하다가 갑자기 리프트를 타고 내 머리 위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의식하는 것이다. 나는 어리석게도 그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주의가 스키에서 사람들에게로 옮겨 간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면 스키를 잘 타지 못한다. 멋지게 넘어져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 뿐이다.

자아 1에 정신을 빼앗기면 슬로프를 똑바로 보지 못하며 몸의 움직임과 스키를 느끼지 못한다. 감각이 둔해지면 실수를 하고, 몸의 균형을 잃고 더 자주 넘어지게 마련이다. 스키를 잘 못 타면 더 긴장하게 되고, 그에 따라 몸이 굳어져서 균형과 컨트롤을 잃게 된다. 그러면 자아 1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친다. “거봐, 네 실력으로는 이 슬로프를 내려갈 수가 없어.”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곧바로 몸의 동작으로 이어진다.

로베르토 아사지올리 박사의 ‘의지의 작용(The Act of Will)’을 보면 생각과 행동 사이의 이런 상관 관계가 잘 묘사되어 있다. “이미지, 머리 속의 그림, 개념 따위는 그에 상응하는 육체적 상태와 외적 행위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자아 1의 근본적인 목표는 계속 존재하면서 우리의 스키와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스스로 그 자신을 제거하는 작업에 나서는 척하기도 한다. 아마 여러분도 자아 1과 자아 2에 대한 이런 이야기를 읽고 나서 자신의 단점에 화가 날지도 모른다. 자아 2가 더 자주 주도권을 잡지 못하는 것에 낙담하면서, 자아 1이 주도권을 잡을 때마다 자신을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자신의 스키 자체를 비판하는 대신, 자신이 비판적이라는 것과 정신적 훈련을 잘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신을 비판하는 것이다. 스키를 잘 타기 위해 긴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전념하려고 긴장하고, 너무 애쓰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 1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주도권을 유지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자아 1의 인격을 심판관이라고 한다. 심판관은 스키를 어떻게 타야 하느냐보다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정말 교활하지 않은가? 이렇듯 자아 1은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자아 1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자아 1을 굴복시키기 전에 먼저 그 정체를 간파해야 한다.

 


자아 1 굴복시키기

 


자아 1은 생각보다 강하며 잠재우기가 쉽지 않다. 그 다양한 역할들은 야생마들처럼 하루 종일 사방팔방으로 날뛰며 우리를 끌고 다닌다. 어느 한 가지 목표를 위해 그것들을 이용하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제각기 제멋대로 굴며 우리의 명령에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나 스키를 탈 때 오직 현재에만 정신을 집중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다음 회전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방금 한 회전을 비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두려움과 자기 회의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것을 잠재울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얼마나 통제할 수 있을까?

자아 1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면 이길 가능성이 희박하다. 우리가 원하는 평온한 상태와 정반대되는 끝없는 전쟁이 머리 속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자아 1과의 싸움 자체보다 자아 1을 굴복시키는 데 정신을 집중하게 된다. 우리 자신의 생각들에 대한 우리의 정당한 지배권을 되찾아, 그것들이 원하는 곳으로 끌려 다니지 않고 우리가 방향을 정하기 위해 온 정신을 쏟게 된다. 정신적 훈련의 목표는 자아 1을 잠재움으로써 자아 2가 그 진정한 능력과 선택한 방향을 자유로이 표출하게 하는 것이다.

자아 1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는 과정의 첫 단계는 자아 1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 1이 우리의 참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신이 하는 생각들과 역할들을 잘 살펴보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생각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아 1을 객관적으로 관찰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더 이상 자아 1을 우리 자신으로 여기지 않음을 뜻한다. 이를테면 내가 허영 씨를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여기면,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 다시 스키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다. 자아 1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꿈을 꾸고 있는 상태에서 그것이 꿈일 뿐임을 인식하는 것과 같다.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면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아 1에서 벗어나 더 이상 자아 1의 의혹과 두려움과 욕망에 좌우되지 않으면 자아 1을 굴복시킬 수 있다. 이 목표에 가까워지면 자아 2가 점점 더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자아 2를 믿어라

 


우리의 잠재력을 발휘하기 위한 정신적 훈련에는 두 가지 기초 단계가 있다. 자아 1을 잠재우는 것과 자아 2를 믿는 것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기술이 병행되어야 한다. 자아 1이 설치는 것은 자아 2의 능력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잔소리를 해 대겠는가. 스키에서 자아 2를 믿는다는 것은 자아 2가 우리 몸의 움직임을 통제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초보자가 자신의 몸을 믿기만 하면 당장 스키를 능숙하게 타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몸이 이미 할 수 있는 일은 하게 하고, 아직 할 수 없는 일은 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왜 자아 2를 믿어야 할까? 갑자기 스키를 잘 탈 때 보았듯이, 실행과 배우는 능력에서 자아 1보다 자아 2가 더 믿음직스럽기 때문이다. 자아 2를 믿는다는 것은 곧 자신감을 뜻한다. 자신감이란 자아 1이 자아 2의 놀라운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려운 일을 하는 데 자신감이 필수적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자신감을 갖는 방법은 잘 모른다. 우리 자신의 능력을 믿는다는 것은 결심이자 과정이다. 열다섯 살 된 아들에게 자동차 운전법을 가르치는 아버지를 예로 들어 보자. 아버지가 아들을 믿겠다고 결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믿음은 일정 기간 동안 아들의 운전 기술이 향상되어야 생겨나고 점점 커진다. 이를테면, 처음에는 아들에게 텅 빈 주차장에서만 운전해 보게 하다가 나중에는 한적한 국도에서 운전해 보게 할 것이다. 절대로 고속도로에서 운전해 보라고 하지는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책임감 있는 스키 강사라면 초보자를 상급자 코스로 데려가지 않는다. 믿음은 중요한 것이지만 개개인의 능력과 상황에 맞게 주어져야 한다. 만일 아들에게 자동차 운전법을 가르치는 아버지가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 대고 다른 차가 나타나기만 하면 직접 핸들을 잡는다면, 아들이 자동차 운전법을 제대로 배울 수도 없고 믿음이 생겨날 수도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이 경험에서 배울 수 있다고 믿지 않는 것은 성장과 발전을 스스로 가로막는 것이다.

자아 2가 주도권을 잡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자아 2가 믿을 수 있는 존재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실수를 할 때마다 또다시 자아 1이 끼여들게 내버려두면, 자아 2가 스스로를 바로잡는 능력을 발견할 수가 없다. 자아 2에 대한 믿음을 되찾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자아 2를 믿겠다고 ‘결심’하고 자아 2가 그 능력을 보여 줄 기회를 주지 않는 한, 이 과정은 시작도 될 수 없다. 자아 2가 스키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우리가 걸음마를 배울 때 넘어질 때마다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바로잡았음을 상기해 보라.

이제부터는 정신의 간섭을 잠재우는 우리의 능력을 높이는 한편 우리의 타고난 실행 및 학습 능력에 대한 인식과 믿음을 키우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Posted by Curatio :